• 아시아투데이 로고
[전두환 별세] 12·12쿠데타부터 내란죄 투옥까지 (종합)

[전두환 별세] 12·12쿠데타부터 내란죄 투옥까지 (종합)

기사승인 2021. 11. 23. 17:18
  • 페이스북 공유하기
  • 트위터 공유하기
  •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
  • 카카오톡 링크
  • 주소복사
  • 기사듣기실행 기사듣기중지
  • 글자사이즈
  • 기사프린트
전두환 전 대통령 사망
제11·12대 대통령을 지낸 전두환 전 대통령이 23일 사망했다. 사진은 1979년 11월 6일 전두환 당시 계엄사 합동 수사 본부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 사망사건 관련 발표를 하고 있는 모습./연합
전두환 전 대통령이 23일 별세했다. 향년 90세.

전 전 대통령은 1931년 1월 18일 경남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.

1941년 대구에 정착한 전 전 대통령은 1950년 대구공고 기계과를 졸업한 뒤 이듬해 육군사관학교 11기로 입교했다. 당시 육사에서 동기인 노태우 전 대통령, 정호영 전 육군참모총장 등과 가깝게 지냈다.

1955년 육사 졸업 후 육군 소위로 임관한 그는 1961년 박정희 당시 육군 소장의 5·16 정변을 계기로 인생의 변곡점을 맞게 됐다. 당시 전 전 대통령은 육사 생도들을 설득해 지지를 이끌어 냈고, 이 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신임을 얻게 됐다.

당시 그는 박 전 대통령으로부터 국회의원 출마도 권유받았으나, 이를 거절하고 군인으로 남으며 무인(武人)으로서 출세 가도를 달렸다. 이때 동기인 노 전 대통령 등과 함께 육군 내 사조직인 ‘하나회’를 결성했다.

1976년 3월 차지철, 박종규 등의 추천으로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 겸 보안차장보로 발탁된 그는 1979년 3월 육군본부 보안사령관이 됐다. 당시 박 전 대통령이 사망한 10·26 사태가 발생하자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박 전 대통령 암살 사건을 수사했고, 혼란스러운 정국을 틈타 같은 해 12·12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계엄사령관이던 정승화를 연행하고 군을 장악했다. 이듬해 중장으로 셀프 진급한 그는 다섯 달 후에는 대장으로 진급했다.

1980년 ‘서울의 봄’으로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분출됐지만, 당시 전두환 신군부는 5·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발동해 영장 없이 학생·정치인·재야인사 2699명을 구금했다. 당시 김대중·김영삼 등 주요 정치인들도 함께 체포됐으며, 국회도 폐쇄됐다. 또 이에 맞선 5·18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했다.

실권을 잡은 전 전 대통령은 최규하 대통령이 물러나자, 1980년 9월 1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투표로 11대 대통령에 취임했다. 이어 대통령 임기 7년 단임과 간선제 선출을 골자로 한 헌법 개정안을 공포하고, 1981년 3월 3일 간접선거를 통해 12대 대통령에 다시 당선됐다. 본격적으로 5공화국 시대를 연 것이다.

전 전 대통령은 정권 출범 초기 야간통행 금지조치 해제와 학원 두발·복장 자율화 등 유화 정책을 펴기도 했지만, 삼청교육대를 창설해 인권침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. 이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, 이한열 열사 최루탄 사망 사건 등이 드러나면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 주장이 불거졌다.

이에 전 전 대통령이 일체의 개헌 논의를 금지하는 호헌조치를 발표하자 국민적 분노는 더욱 불타 올랐다. 이후 집권여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노 전 대통령이 직선제 개헌 요구를 전격 수용한 6·29 선언을 발표했고, 전 전 대통령도 1988년 임기를 마치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 설악산 백담사에서 769일간 은둔생활을 했다.

백담사 유배 중이었던 1989년 12월 31일에는 야권의 요구로 국회 광주특위와 5공특위 합동회의에 출석, 증언대에 서기도 했다. 당시 국회의원이던 고(故) 노무현 전 대통령이 국회 청문회장에서 그에게 명패를 집어 던진 장면은 5공 청산의 한 장면으로 평가받는다.

이후 백담사에서 연희동 자택으로 돌아왔지만, 김영삼 전 대통령의 문민정부에서 과거사 청산 조치에 따라 법정에 서게 됐다.

1995년 검찰 수사를 받던 전 전 대통령은 출석 통보를 받고도 연희동 자택에서 “검찰 수사에 협조하지 않겠다”는 ‘골목길 성명’을 발표했다. 그러나 이후 곧바로 구속영장을 받게 된 그는 압송됐고, 1심에서 내란죄·내란목적살인 등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. 이후 이후 ‘국민 대화합’을 내세운 김영삼 전 대통령의 결단으로 1997년 12월 22일 특별사면됐다.

그러나 전 전 대통령의 수난은 끝나지 않았다. 노무현정부 시절 전 전 대통령은 훈장을 반납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. 당시 전 전 대통령은 훈장을 반환하지 않았다가 7년 만인 2013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등 12·12 이후 받은 9개의 훈장을 반납했다.

2017년에는 회고록을 냈다. 그는 회고록에서 5·18 광주민주화운동을 ‘폭동’으로 규정했고, 자신을 ‘광주사태 치유를 위한 씻김굿의 제물’이라고 주장했다. 또 5·18 당시 헬기사격 증언을 한 고 조비오 신부를 향해 “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”라고 비판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. 그는 1심에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항소했다. 그러나 전 전 대통령이 별세함에 따라 이번 재판은 종결된다.


ⓒ아시아투데이,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


댓글